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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와 천체 - 1543년에 출판되어 혁신을 불러 온 두 권의 책 목록

조회 : 6704 | 201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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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진 해! 그 역사의 현장을 보기 위해 타케베 시간 여행사는 500년 가까이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고 해도, 먼 훗날 역사의 연표에 크게 새겨지는 해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70년 전인 1543년은 그런 「전환의 해」 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근대 의학을 도입한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한 7 권의 책 (통칭 파브리카, Fabrica)」와 지구를 움직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대해」가 출판되었기 때문이지요. 덧붙여 말하자면, 그 해는 일본의 타네가섬에 도착한 포르투갈의 배가 총을 전해준 해이기도 했답니다.
인체와 천체 연구에 혁신을 불러 온 두 권의 책은, 신이 지배하고 있던 지(知) 의 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르네상스, 종교 개혁기의 격동하는 유럽으로 시간을 여행하여 진실을 쫓으며 시대와 싸우는 두 명의 저자를 만나보았답니다.

 

 

그림 같은 해부서가 태어나다 – 1542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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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살리우스(벨기에)

 

이곳은 북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 대학의 학부 연구실. 플랑드르(현재 벨기에)에서 유학을 와서 해부학, 외과학 교수가 된 28세의 베살리우스(Vesalius)가 다음 해에 출판 될 해부서 「파브리카」의 요약판 「인체 구조론의 초록」을 스페인 펠리페 왕자에게 바치는 헌사를 쓰고 있었습니다.
「자연철학에서 매우 월등한 부문, 즉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완전하며 동시에, 최고의 존엄을 갖춘 구조를 다루는 부문이 자연의 여러 작품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눈 앞에, 마치 그림처럼 보여지길 바랍니다.」
이 책에 실려있는 「생각하는 골격인」이란 그림은, 묘비 위의 두개골에 손을 올리고 골똘히 생각하는 그림입니다. 거기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흐름을 따르는 과학과 미술의 융합이 있었습니다. 매력적인 그림들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그의 정신은 700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본편 「파브리카」에도 넘쳐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해부수업은 외과의사이기도 한 이발사에게 집도를 맡기고, 교수는 2세기 그리스 의학자인 갈레노스의 교과서를 확인할 뿐 이었습니다. 베살리우스가 목표로 한 것은 직접 자신의 눈과 손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파브리카」에는 팔을 해부하고 있는 자화상(위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는동안 지도자로 추앙받던 갈레노스의 잘못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는 인체를 한번도 해부 한 적이 없으며, 원숭이나 개를 해부하는데 그쳤다.」라며 거칠게 비판했습니다. 14세기나 이어져 온 권위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요하게 인체해부를 이어온 베살리우스에 대한 종교계 등의 반발은 거셌습니다. 스페인 국왕을 계승한 펠리페도 그를 고발했습니다. 베살리우스는 예루살렘을 성지 순례하고 돌아오던 중 그리스의 자킨토스 섬에서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임종에 저자에게 도착한 「금서」 - 1543년 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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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폴란드)

 

발트해에 인접한 폴란드의 프롬보르크에서 70세가 된 대성당 참여회원 코페르니쿠스가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뇌출혈로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어, 몽롱한 상태였습니다. 독일의 뉘른베르크로부터 막 찍혀 나온 문서가 도착했습니다. 제본 전의 인쇄물이었답니다. 환자는 자신의 이름과 서명이 적힌 표지가 눈에 들어보자 안도한 듯 눈을 감고 영원한 잠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천체의 회전에 대해」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저자는 이 책이 과학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어디까지 내다 보고 있었을까요?
  지금은 코페르니쿠스라 하면 대천문학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본래 직업은 성직자이며 의사이기도 했습니다. 젊은시절 이탈리아 유학 중에 천문학에 흥미를 느껴 관측데이터를 해석하던 중,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가 확립한 천동설에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지구가 자전하며, 태양의 주위를 지구나 다른 혹성이 공전하고 있다」라는 지동설은 자연은 아름다운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는 신념이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집대성하기에 주저했던 이유는 비상식적이라 비웃지는 않을지, 교회의 분노를 사지 않을지 걱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에서 온 젊은 제자 레티쿠스의 집요한 설득으로 출판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초판의 첫머리에는 「이 저술의 가설에 대해 독자에게」란 제목이 붙은, 「이들 가설이 옳다든가 사실 같지 않다든가 하는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관측에 따라 계산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라는 신학자 오시안더의 변명 비슷한 문장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제 2 판은 1566년 스위스의 바셀에서 간행되어 모두 1000부 정도가 배포된 것 같습니다. 점차 높은 평가를 받게 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1616년에는 카톨릭의 금서 목록에 기재되었고, 1633년에는 종교재판을 통해 유죄를 선고 받은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설을 버리도록 강요 받았습니다. 금서목록의 딱지를 떼어낸 것은 1835년이 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 Science Window
- 발행인 : 일본 독립행정법인 과학기술진흥기구
- 출처 : Science Window / 2013년 4~6월 (통권 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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