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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톤’으로 대통령이 된 과학자 ? 하임 바이쯔만 목록

조회 : 519 | 2017-06-21

아세톤

 

여성들이 매니큐어를 지울 때 쓰는 아세톤은 유리 등에 남은 지저분한 스티커 자국 등을 깨끗이 없앨 때에도 유용한, 생활 편의품이다. 하지만 플라스틱에 사용하는 것은 금물인데, 플라스틱을 녹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아노 건반을 아세톤으로 닦다가는 광택이 없어져서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아세톤은 휘발성이 강한 유기용매로써 여러 가지 물질을 녹이는 액체로 사용되는데 사실 아세톤은 이보다 더 무서운(?)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무연화약의 원료인 니트로셀룰로오스를 잘 녹이기 때문에 화약 제조에는 필수적인 물질인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한 이면에는 영국이 이같은 아세톤을 대량 제조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탄약을 풍부하게 보급할 수 있었던 배경이 있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나라들이 화약의 원료로 칠레에서 나던 초석을 사용했으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영국은 칠레로부터 초석을 들여오지 못하게 됐다. 초석이 없이 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산 성분을 포함한 유기물을 아세톤으로 녹여야 했으나 당시에는 쿠바에서 나는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빼고 난 부산물을 발효하여 아세톤을 제조했기 때문에 원료를 얻기 어려웠다. 이때 영국은 녹말로부터 아세톤을 공업적으로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아세톤의 대량제조 비법을 알아 낸 사람은 유태계 과학자 하임 바이쯔만(Chaim Weizmann:1874∼1952)이었다. 그는 스위스의 프라이보르그 대학 등에서 화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0대가 되면서 영국으로 가 맨체스터 대학에서 생화학 강의를 하였다. 그 뒤 1910년에는 영국 국적도 취득했지만, 사실 그는 열렬한 시오니스트였다. 즉 오랜 옛날에 터전을 빼앗긴 유태 민족이 다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가 자신들만의 나라를 새롭게 일으켜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대 초에 바이쯔만은 인조고무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설탕을 인조고무의 원료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박테리아를 찾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우연히 설탕을 아세톤으로 바꾸어주는 박테리아를 발견하게 됐다. 이 박테리아에는 ‘클로스트리듐 아세토부틸리쿰(Clostridium acetobutylicum)‘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나중에는 ‘바이쯔만 유기물(Weizmann organism)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다. 바이쯔만은 그 뒤 연구를 계속해서 녹말을 설탕으로 변화시키고 이것을 다시 위의 박테리아로 처리해서 아세톤을 대량으로 얻는 공정을 개발했다. 

바이쯔만 이전에는 밀폐된 용기 속에 나무를 넣고 끓이면서 증발되는 증기를 모아 아세톤을 추출하곤 했다. 당연히 이런 방법으로는 얻을 수 있는 아세톤의 양이 극히 적었고 그나마 나무도 무한정 베어 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세톤의 수요가 크게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1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차 대전의 발발로 영국은 포탄 제조 등에 필요한 화약의 수요가 늘어났지만 공급이 충분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마침 군수물자 담당 장관인 로이즈 조지가 맨체스터 가디언 지의 편집장 C. P. 스콧을 만났다가 바이쯔만이라는 과학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 군부의 고민거리가 극적인 해결의 열쇠를 찾게 된 것이다. 


산림 자원이 그리 풍부하지 않은 영국에서 나무를 대량으로 증류시켜 아세톤을 찔끔찔끔 얻어내는 대신, 바이쯔만이 개발한 방법을 이용하니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감자나 보리 등 녹말의 원료가 되는 곡물들은 여유가 있었고, 미국에서 수입한 대량의 옥수수도 아세톤의 원료가 되어주었다. 게다가 아세톤을 얻을 수 있는 효율은 훨씬 높았다.


결국 국내외 여러 곳에 아세톤 제조 공장을 건설한 영국은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나중에 영국 수상이 된 로이드는 당연히 바이쯔만에게 적절한 명예나 보상으로 보답하려 했다. 그러나 열성적인 시오니스트였던 바이쯔만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들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고 바이쯔만의 이런 노력은 1917년의 ‘발포어 선언’을 이끌어내게 됐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발포어가 유태인 독립국가의 건설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결국 이런 과정들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바이쯔만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임시대통령직을 맡은 뒤 다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이미 세계시오니즘연맹 총재를 두 번이나 역임하면서 이스라엘 건국에 크게 기여한 그로서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여길 만한 일이었다. 그는 그 뒤로 대통령에 재선되어 나라에 봉사하다가 퇴임한 뒤 텔아비브 근처의 작은 학술도시에서 후학들의 연구를 지원하며 다시 과학자로서의 말년을 보냈다.



바이쯔만은 훌륭한 과학자인 동시에 노련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영국은 1917년에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발포어 선언’을 했지만, 그보다 앞서서 1915년에 아랍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한다는 ‘맥마흔 선언’을 이미 공포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바이쯔만 및 당시 유럽에서 막강한 금권을 쥐고 흔들던 유대계 금융자본인 로스차일드 집안의 영향력 등에 의해 다시 유대계 지지로 돌아선 것이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인명들의 희생이 계속되고 있는 중동 분쟁은 이렇듯 우유부단했던 당시 영국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러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바이쯔만은 실험실에만 처박혀 있던 과학자가 아니라 노련한 정치외교가로서의 수완도 발휘했던 것이다.

 

글 : 박상준 -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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