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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와인의 명성, 원산지 표시제도로 만들었다 목록

조회 : 2434 | 2016-03-23

프랑스 와인의 명성, 원산지 표시제도로 만들었다 


축하할 일이 생기거나 특별한 손님을 모실 때는 식탁에 와인을 한 병 올려서 분위기를 돋우기도 한다. 그런데 적당한 와인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미국, 아르헨티나, 호주,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메뉴에 적힌 종류만 수십 가지가 넘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의 와인 중에서 특히 높은 가격에 팔리는 것은 프랑스산이다. 종류가 다양한데다가 품질까지 좋아 격식 있는 자리에서 환영을 받는다.

 

프랑스 와인을 마시기로 결정했어도 구체적으로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생산지에서부터 품종, 생산년도, 가격까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 우선은 붉은색 레드와인과 투명한 화이트와인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고기 요리나 양념이 센 음식은 레드와인, 생선 요리나 간이 세지 않은 음식은 화이트와인이 어울린다.



보르도, 부르고뉴, 론, 루아르, 알자스, 샹파뉴, 랑그독 등 대표 생산지 중에서 선택하되 품종도 함께 살핀다. 보르도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레드와인이 많다. 부르고뉴 지역의 레드와인은 ‘피노 누아르’, 화이트와인은 ‘샤르도네’ 품종이 대부분이다. 론 지역은 북쪽의 ‘시라’와 남쪽의 ‘그르나슈’가 레드와인으로 유명하지만 섞어서 만드는 곳이 많다. 품종이 쓰여 있지 않은 와인은 여러 품종을 블렌딩해서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생산년도는 당시의 기후가 어땠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판단의 기준이 되지만 가격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서 마침내 적합한 와인을 주문한다. 종업원이 유리잔에 서빙을 해주면 다들 잔을 들고 쨍 하는 경쾌한 소리로 건배를 한다. 처음에는 색깔을 감상하고 냄새를 살짝 맡은 다음 한 모금 마신다. 새콤하기도 하고 떫거나 달기도 한 와인이 입안에 들어왔다가 목으로 넘어가면 손님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그까짓 와인 한 잔 맛보겠다고 이렇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나. 프랑스는 왜 이리도 와인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프랑스 와인은 언제 어떻게 고급 제품으로 자리매김했을까. 비결은 ‘지리적 표시제도’에 따른 까다로운 규제와 관리에 있다.



지리적 표시제도(GIS)는 말 그대로 ‘어느 곳에서 재배되거나 수확되었는지’를 밝히는 제도다. 특히 농산물은 지역에 따라 품질과 특성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생산지를 명시하면 유사 제품과의 차별성이 부각돼 소비자의 선택을 돕는다. 고품질을 유지해온 지역민의 노력을 지적재산으로 인정하고 보호함으로써 명맥 유지를 돕는 효과도 있다.



고대 그리스는 이미 기원전 7세기에 특급 와인에 생산지를 표시했다. 인류가 지리적 표시의 이점을 깨달은 지 2500년도 넘었지만, 법률을 제정해 보호하기 시작한 것은 100년을 조금 넘겼다. 지리적 표시제도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첫 국가는 프랑스다. 1905년에 와인을 비롯한 농산물의 생산지를 표기하는 법령을 제안하고 1919년 정식으로 발의했다. 처음에는 농민들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1935년에는 포도주·증류주 국가위원회(CNVE)를 세웠고 1947년에는 국립 원산지표시 품질관리원(INAO)을 출범시켰다. 1955년에는 일반 농산물이 아니라 가공식품인 치즈도 지리적 표시를 의무화했고 1990년에는 농업 전체로 확대 적용했다.



현재 프랑스 내에서 생산된 모든 농산물은 어느 지역에서 생산했는지를 반드시 표기해야만 판매할 수 있다. 덕분에 소비자는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안전한 먹거리를 구매하게 됐고 정부는 지속적인 품질 관리 정책을 펴는 한편, 농민들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지역색을 중시하는 전통 때문에 법제화 훨씬 이전부터 수백 년 동안 농산물의 원산지 표시를 당연하게 생각해온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 거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다. ‘몸과 땅은 서로 다르지 않다.’ 즉 사람은 거주지 인근에서 수확한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도 이와 비슷한 단어를 사용한다. ‘테루아(terroir)’다. 우리말로는 ‘토양’으로 번역되지만 본래의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개입까지 함께 지칭하는 표현이다. 각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는 데 필요한 지리, 기후, 지질, 농법 등 환경 전체를 가리킨다.



농산물의 품종이 같아도 어떤 테루아에서 재배됐는지에 따라 맛과 상태에 차이가 난다. 작물의 특성과 지역의 조건을 잘 알고 있는 농부가 재배해서 제품으로 가공할 때 재료는 최상의 맛을 낸다.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노하우를 쌓아온 지역 농부들의 노력과 자존심을 하나의 지적재산으로 인정해줄 때 국가 전체의 농업도 힘을 유지한다.



그러나 프랑스가 지리적 표시제도를 시작한 이유를 살짝 들춰보면 자존심과 더불어 ‘위기감’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통해 세계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오던 콧대 높은 나라였지만, 19세기 말 미국으로부터 해충 필록세라(phylloxera)가 전래되면서 와인 생산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필록세라는 흙 속에 사는 진딧물 같은 곤충인데 포도나무의 뿌리를 파고들어 말라죽게 만든다. 수많은 연구에도 퇴치법을 찾아내지 못해 전국의 포도밭이 황폐화됐다.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필록세라에 저항성을 가진 미국산 포도나무 뿌리를 수입해서 프랑스 땅에 심고 그 위에 기존 포도나무 가지를 접붙여서 해충이 땅으로부터 못 올라오게 만드는 방법이다. 당시로서는 최하품 취급을 받던 미국의 포도나무를 이용한다는 말에 프랑스 농민들은 반대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존심과 위기감의 팽팽한 대결 끝에 기사회생의 쓰디쓴 처방을 받아들였다. 이후 지역과 자국의 농산물 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지리적 표시제도다.



프랑스 와인은 아오쎄(A.O.C.)라는 이름의 지리적 표시제도를 운영 중이다. 우리말로는 ‘원산지 명칭 통제·관리’로 해석된다. 와인 병에 붙은 라벨을 살펴보면 크게 상표, 품종, 연도, 지역의 4가지를 읽어낼 수 있다. 상표, 품종, 연도는 쉽게 읽어낼 수 있지만 지역명은 표시가 복잡하다. ‘오리진(Origine)’ 즉 원산지에 해당하는 단어 앞뒤로 ‘아펠라시옹(Appellation)’과 ‘콩트롤레(Controlée)’라는 글자가 붙는다. 아펠라시옹은 명칭, 콩트롤레는 통제·관리란 뜻이다. 와인 생산지를 표시할 때는 법에 따라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보르도에서 생산된 와인은 ‘아펠라시옹 보르도 콩트롤레’, 부르고뉴에서 만들어졌다면 ‘아펠라시옹 부르고뉴 콩트롤레’라고 쓴다.



프랑스의 와인은 품질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뉜다. 저품질 일반 와인은 ‘뱅 드 타블(Vin de Table)’이라 하는데 식탁에 두고 부담 없이 마시라는 뜻이다. 품종이나 재배방식에 대한 규제가 별로 없어서 저렴한 가격에 생산이 가능하다. 그 위 등급은 지역(pays)에서 관리한다 해서 ‘뱅 드 페이(Vin de Pays)’라 부른다. 그 위 등급이 ‘아오쎄’에 해당한다. 프랑스 와인을 고를 때 ‘아펠라시옹’과 ‘콩트롤레’라는 표현이 보인다면 믿고 마셔도 좋다. 종업원에게 “아오쎄 등급이냐”고 미리 물어보고 확인하면 된다.



요즘은 미국과 아르헨티나와 같이 신대륙에서 생산된 와인이 환영을 받는다. 기후가 일정하고 병충해가 적어 높은 품질에도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프랑스 와인이 주는 고급 이미지를 따라가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명성은 몇몇 회사의 마케팅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겨난 거품이 아니라 원산지 표시를 국가 차원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며 법적으로 보호해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아오쎄 등급의 와인을 마실 때는 프랑스 사람들처럼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를 외쳐보자. “썽떼(Santé)!”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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