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과학상자에 담으시겠습니까?
조회 : 2710 | 2014-07-30
“사람과 분간할 수 없는 컴퓨터 인공지능이 나타났다. 조만간 컴퓨터가 사람을 사칭해 사이버 범죄를 저지를 지도 모를 일이다.”
2014년 6월 8일 세상이 떠들썩했다. 사람과 구분할 수 없는 인공 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이 나타났다는 보도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영국 레딩대학교는 “인공지능 분야에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라며 “컴퓨터 프로그램 ‘유진 구스트만(이하 유진)’이 65년 만에 처음으로 인공지능을 가늠하는 기준인 튜링테스트를 통과했다”라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어수룩한 프로그램이 어떻게 최초의 인공지능으로 인정받은 것일까. 레이 커즈와일은 튜링 테스트 자체가 지닌 허점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유진을 만든 러시아 개발진은 유진에 독특한 캐릭터를 덧입혔다. 유진이 우크라이나에 사는 13살 소년인 척 하도록 한 것이다.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10대 소년이라는 설정 덕분에 대화가 조금 어그러지더라도 심판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핑계 거리를 마련해둔 것이다. 개발진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 비슬로프는 유진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 공을 많이 들였다고 말했다.
“유진은 2001년 태어났습니다. 우리 아이디어의 핵심은 이거죠. 유진은 무엇이든 다 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걸 완벽하게 알지 못해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죠. 우린 오랫동안 그럴듯하게 보일 캐릭터를 개발했습니다.”
■ “유진 튜링 테스트 통과는 꼼수일 뿐”
유진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발표한 케빈 워윅 레딩대 교수는 이번 튜링 테스트가 “제한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진이) 미리 정해둔 주제나 질문 없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라며 “이처럼 엄격한 시험을 통과했다는 점에서 (유진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자신 있게 발표 한다”라고 말했다. 레이 커즈와일은 케빈 워윅 교수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13세 소년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효과적인 제약”이라는 게 레이 커즈와일의 지적이다.
또 ‘제한되지 않았다’는 실험 과정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5분 안에 겨우 다섯 개 질문을 던져 컴퓨터와 사람을 구분해내는 실험 절차에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레이 커즈와일은 “이런 짧은 시간 동안이라면 어수룩한 심사위원은 충분히 속아 넘어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컴퓨터 인지과학자인 조슈아 테넘바움도 레이 커즈와일의 비판에 힘을 보탰다. 그는 유진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딱히 신기할 일이 아니라”라며 “그럴싸한 챗봇 이상으로 훌륭한 인공지능을 만들려면 약간의 운과 우연이 당신을 도와줘야 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 튜링 테스트 통과했다고 진짜 인공지능일까
이런 해프닝이 생긴 이유는 인공지능을 가늠하는 잣대로 사람과 자연스레 채팅하는 능력을 꼽았기 때문이다. 만일 레딩대 튜링 테스트가 컴퓨터와 음성으로 대화를 주고받도록 했다면 유진은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심판이 5분이 아니라 10분 동안, 횟수 제한 없이 레이 커즈와일처럼 채팅했다면 유진은 정체를 숨길 수 있었을까. 아마 힘들었을 것이다.
튜링 테스트라는 시험 자체가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온다.튜링 테스트가 처음 나온 것은 1950년이다. 한국은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을 때고, 앨런 튜링이 살던 영국도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이제 막 씻어내던 찰나였다. 요즘 전자계산기보다 못한 컴퓨터가 세상에 막 나올 무렵이었다. 사람의 지능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을 때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진짜 인공지능이라면 종합적인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인터넷 서점이 내 구매 목록을 바탕으로 새로 나온 책 중에서 내가 살 만한 책을 추천해주거나 애플 음성 비서 ‘시리’가 내 말을 알아듣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일 따위를 우리는 인공지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특정한 상황에 주어진 일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진도 마찬가지다. 튜링 테스트라는 틀 속에서 채팅으로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고 불리한 대답은 이리저리 피해가도록 고안된 똑똑한 챗봇일 뿐이다.
게리 마르쿠스 뉴욕대 인지과학자는 기술 발전에 발맞춰 튜링 테스트를 판올림(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짜 인공지능이라면 TV프로그램이나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그 내용에 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사람처럼 정보를 모으고 종합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진정한 인공지능이라는 뜻이다.9시 뉴스를 보고 왜 세월호 유가족이 국회 앞으로 향하는지 답할 줄 알아야 하고, 개그콘서트를 보고 ‘여기가 웃음 포인트’라고 짚어줄 정도는 돼야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쯤 진정한 인공지능이 나타날지 알기는 힘들다. 혹자는 수백 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레이 커즈와일은 2029년이라고 말했고, 영화 ‘그녀’는 10년 뒤인 2025년께 컴퓨터 프로그램이 자기 존재를 자각하고 인간을 뛰어넘는 모습을 그렸다. 정확한 시기를 짚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조금씩 그날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글 : 안상욱 블로터닷넷 기자
출처 : KISTI과학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