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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맛있게 해주는 말벌, “고마워~” 목록

조회 : 2213 | 2012-08-27

올해에는 유난히 독이 있는 동물들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한 여름엔 해파리가 출몰해 바다에도 맘 놓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가 하면 도심에서는 말벌이 나타났다고 난리다. 서울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지난 7월에만 2000건이 넘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한다. 추석을 전후해 벌초와 성묘를 하다 또 몇 사람이 말벌에 희생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과학동아’ 9월호에 실릴 ‘말벌 습격’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면서 한 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책 ‘Bees, Wasps, and Ants(꿀벌과 말벌, 개미)’에서 말벌에 관한 부분을 좀 읽어봤는데 말벌이 그렇게 나쁜 곤충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책 제목이 좀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덧붙이면 위의 세 곤충은 모두 말벌목(目)에 속한다. 미국 농무부의 곤충학자 에릭 그리셀 박사가 쓴 이 책은 대중을 위한 말벌목 곤충 개론서다.

말벌은 곤충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있으면서 곤충 개체수 조절에 큰 역할을 한다. 따라서 말벌이 사라진다면 생태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벌이라고 부르는 곤충은 말벌목 가운데서도 말벌과(科)에 속하는 종류로 우리 조상들은 이를 또 말벌, 땅벌, 쌍살벌로 구분했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곤충, 즉 꿀벌처럼 집을 짓고 수백~수천 마리가 여왕벌 한 마리를 모시고 산다. 이 가운데 나무나 바위에 집을 짓는 종류가 도심까지 건너와 처마나 벽에 집을 짓는 것이다.

●포도 효모는 어디서 왔나?

그런데 과학저널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8월 14일자에 말벌과 관련된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 포도를 발효시켜 와인으로 만들어주는 미생물인 효모가 살아가는데 말벌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것. 다른 곤충을 잡아먹고 사는 말벌이 어떤 식으로 효모를 위해 일을 한다는 말일까.

먼저 말벌의 식성에 대해 잠깐 얘기해보면 말벌 성체는 육식동물이 아니다. 이 녀석들은 곤충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기를 저며 경단을 만든 뒤 집으로 날아가 애벌레를 먹인다. 정작 성체가 먹는 건 수액이나 화밀, 꿀이다. 장수말벌처럼 큰 말벌은 종종 꿀벌집을 습격하는데 꿀은 자기들이 먹고 꿀벌 애벌레는 잡아다 자기 애벌레에게 먹인다.

포도밭에서 포도가 익어갈 무렵 말벌들은 배를 채우려고 포도송이를 찾는다. 포도 알갱이는 단단한(곤충의 입장에서) 껍질에 싸여있기 때문에 말벌은 강한 턱으로 껍질에 상처를 내 안의 과즙을 빨아먹는다. 이 꼴이 보기 싫다고 말벌을 없앴다가는 이듬해 와인은 형편없을 거라는 게 논문의 결론이다.

이탈리아 플로렌스대 발효학과 두시오 카발리에리 교수팀은 포도 발효의 미스터리를 풀기로 했다. 즉 포도는 따로 효모를 넣어주지 않아도 발효가 되는데 이는 포도껍질에 효모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도가 익기 전에는 대표적인 발효 효모인 사카로미세스 세레비시아 (Saccharomyces cerevisiae)가 붙은 포도가 0.05%에 불과하지만 다 익은 손상된 포도에서는 25%에 이 효모가 붙어있다. 그런데 효모균은 바람에 날려 옮겨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뭔가가 효모를 옮긴다는 것인데 그 실체를 몰랐던 것.

연구자들은 말벌이 유력한 후보라고 보고 포도밭 주변에서 계절별로 말벌을 채집해 내장을 검사해봤다. 그 결과 예상대로 다양한 효모가 발견됐다. 결국 말벌이 포도즙을 먹으려고 껍질을 찢을 때 입에 묻어있던 효모가 옮겨갔다는 얘기다. 또 말벌이 겨울을 난 뒤에도 장 속에 여전히 효모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애벌레에게 먹이를 게워 먹이는 과정에서 효모가 딸려가면서 자손 말벌에게도 자연스럽게 효모가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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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의 당을 발효시켜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만드는 미생물 효모. 균주에 따라 생리활성이 다르기 때문에 독특한 풍미를 낸다. (사진 위키피디아)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포도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수천 년 전 이미 말벌은 효모 유지와 진화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지역에 특이한 효모 균주가 자라면서 지역마다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 와인이 나오는데도 기여했다는 것. 실제로 특정 지역에서 채집한 말벌에서 얻은 효모 균주는 다른 지역에서 채집한 말벌에서 얻은 효모 균주보다 같은 지역의 포도에서 얻은 효모 균주와 더 가까웠다. 이는 계절과 해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즉 말벌-효모-포도의 생태연결고리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말이다.

얼마 전 우연히 양조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강사분이 지난 해 일본에서 열린 사케(정종) 품평회에 갔다 온 경험을 들려줬다. 한 양조업자가 독특한 향미가 나는 사케를 소개하면서 자연에서 얻은 자신만의 효모 균주로 빚은 술이라며 자랑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막걸리 바람이 불지만(벌써 잦아든 감은 있다) 술맛은 비슷비슷하다. 그럼에도 각 지역마다 소량 빚고 있는 전통주들은 자신들만의 누룩을 써서 고유한 풍미를 내고 있다. 이는 누룩에 분포하는 곰팡이와 효모 종류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논문을 보면 말벌은 포도 뿐 아니라 숲속에 자생하는 여러 식물에 효모를 붙이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효모 균주가 자생할 것이고 이 가운데 일부가 누룩에 들어갔을 것이다. 앞서 말한 일본 양조업자처럼 자연에서 새로운 효모 균주를 찾다보면 언젠가는 놀라운 풍미를 내는 우리 술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강석기 기자 suk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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