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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과학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목록

조회 : 877 | 2012-05-17

《과학기술인의 행복을 위해 꼭 해결돼야 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보육 및 육아 지원이다. 실험할 때는 주야가 따로 없이 연구과제에 매달려야 하고, 학술대회 참석을 위한 출장도 있어 아이를 낳고 기르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결혼이나 출산을 앞둔 여성과학기술인이 연구를 중단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이제 연구와 육아의 행복한 공존 방법을 찾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사명이 되고 있다. 육아에 시달리는 현장의 여성과학기술자의 모습을 살펴 보고 국·공립대 직장어린이집, 시간연장형 보육시설 등 이들이 요구하는 대안을 살펴본다.》

출산과 육아, 연구활동까지 병행해야 하는 여성과학기술자를 위한 적절한 대책이 필요하다. 행복한과학기술인 제공

서울 소재의 한 사립대에서 자연과학계열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하나 씨(34)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올수록 마음이 급해진다. 그녀는 22개월 된 남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이 씨는 출근길에 아이를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에 맡겼다가 퇴근하면서 데리고 간다. 어린이집이 운영을 마치는 시간은 저녁 7시 반. 한 시간 떨어진 거리를 제시간 안에 가려면 6시 ‘땡’하는 소리가 무섭게 쏜살같이 튀어나가야 한다.

그녀는 요 며칠 돌려놓은 모델 결과를 확인하고 나간다고 어기적거리다가 연거푸 어린이집에 늦고 말았다. 이 씨가 늦으면 보육 교사들의 퇴근도 늦어진다. ‘지각 상습범’이 된 이 씨는 보육 교사들에게 미운 털이 박혀버렸다.

오늘도 이 씨는 ‘공포’의 7시 반을 넘기고 말았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다른 아이들은 모두 집에 가고 자신의 아이만 남아 잠들어 있다. 보육 교사들에게 눈치 보이는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의 아이만 혼자 남아 잠들어 있는 모습에 이 씨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다. 졸업과 논문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게 육아는 남에게 맡길 수도, 뒤로 미룰 수 없는 현실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서 근무하는 정영임 연구원(35)도 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워킹맘’이다. 정 연구원은 석달 전에 둘째 아이를 낳고 20일 전에 업무에 복귀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21개월 된 첫째 아이는 부산 친정에 맡겼다. 둘째 아이는 낮 동안 아주머니가 봐주고 남편은 일 때문에 지방에서 혼자 지낸다. 이 가족의 구성원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따로 떨어져 보내는 셈이다.

정 연구원은 첫째 아이에게 매주 부산에 내려가 만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업무에 복귀하면서 그 약속은 3주째 지키지 못하고 있다. 자리가 잡히는 대로 첫째도 대전으로 데려올 생각이었지만 그 역시 4월에 장기 출장이 잡히면서 미뤄졌다.

●야근과 출장이 많은 과학자 엄마

일하며 공부하는 엄마들이 늘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이공계학과를 전공하고 연구직이나 기술직에 종사하고 있는 ‘엄마’ 여성과학기술인의 수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요즘 이공계 대학원에서는 엄마 대학원생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연구실에서 풀타임(full-time)으로 근무하면서 연구와 근무, 육아라는 세 가지 업무를 동시에 치르고 있다. 여느 연구기관이나 회사 못지않게 일하면서도 학위를 위해 학업도 따라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는 육아 보조금을 늘리고 탁아 시설을 증축하는 등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다. 대학들도 교직원과 대학원생을 위해 탁아시설을 증축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과학기술인들이 ‘편하게 아이 낳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은 아직도 요원하다.


과학기술인 엄마들은 “일반적인 보육 시설들은 여성과학기술인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며 가장 많은 불만을 쏟아냈다. 특히 보육 시설의 짧은 운영 시간이 지적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보육 시설은 아침 8~9시부터 저녁 7~8시까지 운영되고 있다. 맞벌이 부부들이 출근할 때 아이를 맡기고 퇴근할 때 데리고 가기에 좋은 형태다. 추가 근무가 많지 않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과학기술인들은 “연구 업무 특성상 제시간에 퇴근하기가 힘들어 일반 보육원은 이용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한번 실험을 시작하면 결과가 나오는 데 서너 시간은 물론이고 하루가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이다.

지방 국립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는 김지은 씨(32)는 “실험이 진행되는 중간마다 상황을 체크해야 해서 중간에 다른 일을 본다거나,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며 “학교 안에 육아 시설이 있다고 해도 중간에 아이를 보러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하나 씨도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다 돌아가려면 보통 서너 시간 걸리는데, 퇴근 시간이 겹치면 결과도 보지 못하고 퇴근하는 경우가 많다”며 “애 낳은 이후 좀처럼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반 보육 시설에 아이를 맡기는 여성과학기술인들 중에는 운영 시간이 끝나고 아이를 추가로 더 봐줄 사람을 따로 찾는 경우가 많았다. 이하나 씨도 업무가 늦게 끝나는 날에는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데려다가 봐주고 있었다. 그나마 친정어머니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이 씨는 사정이 나은 편. 가족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김지은 씨는 저녁에만 아이를 봐주는 아주머니를 따로 구해야 했다. 김 씨는 “몇 시간 단위로 보호자가 바뀌다보니 아이 정서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엄격한 조직 문화, 여자의 적은 여자?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신용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과거보다 보육 시설이 크게 늘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아이를 오랫동안 맡아 보살펴줄 사람을 구하기 힘들어 전보다 애 키우기는 더 힘들어진 것 같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신 회장은 “딸을 낳아 키우던 25년 전만 해도 일하는 여성이 많지 않아 아주머니를 구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며 “요즘엔 할머니들도 나름의 사회생활을 즐기는 경우가 늘면서 손자 키우기를 꺼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자신이 과거에 자녀를 키울 때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육아에 대해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던 엄격한 조직 문화를 꼽았다. 특히 같은 여자 선배들이 더 무서웠던 것으로 기억했다.

“내 윗 선배들, 즉 초창기 여성과학자들은 무조건 남성과 똑같이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들 스스로가 육아도, 연구도 완벽한 슈퍼 엄마를 꿈꿔 후배들이 육아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거나 주변에 양해를 구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죠. 지금이야 사회적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육아 휴직도 내고 남자들도 육아를 돕고 있지만, 예전엔 같은 여자 선배가 더 무서웠습니다.”

신 회장은 “엄마들이 스스럼없이 육아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직장 내 분위기가 형성돼야 일하는 여성에 대한 이해도 높아지고 이들을 도울 방안도 좀 더 빨리 마련된다”며 “직장 내 문화 개선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전임 회장이었던 민병주 한국원자력연구원 전문위원(19대 국회의원 당선자·새누리당 비례대표)은 연구 업무 특성상 야근과 지방 출장이 많았던 것을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꼽았다. 민 전문위원은 첫째가 3살, 둘째가 8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캐나다로 장기 출장을 떠난 경험이 있다. 업무를 마치고 4개월 만에 돌아왔는데, 첫째와 달리 둘째는 좀처럼 엄마를 따르지 않고 할머니만 찾았다. 서먹한 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3년이나 걸렸다.

민 전문위원은 “엄마와 많은 교감을 나눠야 하는 시기에 엄마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 간극을 채우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며 “이런 점 때문에 출장이 잦은 여성과학기술인들은 항상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산다”고 말했다.

●여성과학기술인 경력단절은 국가의 손해

사정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갖는 고충의 내용은 2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출산과 보육은 여성과학기술인들에게 얼마나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을까.

2011년 고용노동부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대상자의 62.7%, 여성의 71.1%가 ‘육아부담’을 여성의 경제활동참가를 방해하고 경력의 단절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보육이나 육아로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과학기술인의 44.7%는 ‘아이를 맡길 곳이 적당하지 않아서’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육아의 어려움은 실제로 여성과학기술인의 경력단절로 이어지고 있다. ‘2010 여성과학기술인력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0대 후반에 70~80%대를 유지하던 여성과학기술인의 경제활동 참가비율은 30대에 접어들면서 50%대로 뚝 떨어졌다. 결혼과 출산, 보육, 육아를 경험하면서 경제활동을 그만두는 여성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과 비슷하게 20대에 70~80%대를 유지하던 남성과학기술인의 경제활동 참가비율은 30대로 접어들면서 90%로 뛰어올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민 전문위원은 “30대 초반 여성이 경제활동에서 물러나는 현상은 과학계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며 “하지만 그 감소율은 유독 과학계에서 크게 나타나고 30대 초반에 벌어진 남녀 경제활동인구의 격차는 시간이 지나도 좁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남성과학기술인의 경제활동 참가비율은 30대에서부터 50대 초반까지 90%대를 쭉 유지하지만, 여성과학기술인의 경제활동 참가비율은 30대에 50%대로 떨어진 뒤 50세 초반에 다시 30%대로 뚝 떨어졌다. 일반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비율이 30대 때 떨어졌다가도 40대 때 다시 올라오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과학기술인은 경력이 단절되면 다시 재진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민 전문위원은 “과학 분야는 하루가 다르게 연구 환경과 성과가 바뀌기 때문에 한번 경력이 단절되면 재진입이 어렵다”며 “아이를 낳은 여성에게는 업무 평가를 할 때 예외를 둔다든지, 재택근무나 반일 근무 같은 장치를 마련하는 등 제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대책도 중요하지만 여성 과학기술인들을 처음부터 일을 그만두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과학기술인은 단기간 양성되기 어려운 고급인력이므로 국가나 사회적 차원에서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윤미 기자 ym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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