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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거머리도 피빨리는 시대 목록

조회 : 944 | 2012-05-14

제목은 물론 스토리도 기억이 안 나는, 아주 오래전 TV에서 본 영화의 한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배경은 영국 시골인 것 같은데 아이들이 멱을 감으러 웅덩이에 뛰어든다. 잠시 뒤 물에서 나온 한 아이가 자신의 온 몸을 뒤덮은 거머리를 보고 기절한다. 풀밭에 큰대자로 누워있는 아이의 몸에 붙은 수십(어쩌면 수백) 마리 거머리가 진짜라면 이 친구는 정말 대단한 연기자가 아닐까.

거머리는 고사하고 자벌레가 옷에 달라붙어도 깜짝 놀라는 기자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월이 계절의 여왕이라지만 기자는 사월을 더 좋아하는데 사월에는 아직 벌레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다. 지난 주말 앞산에 올랐다가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자벌레를 발견하고 ‘또 시작이구나’ 한숨이 나왔다. 이 녀석들을 피해가며 걸음을 옮기자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흡혈 산거머리 한반도 상륙!

그런데 수년 뒤에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지난 3월 말 국립생물자원관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흡혈 산거머리를 발견했다는 ‘충격적인’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여름 환경지표 토양동물 현지조사를 하던 연구원들은 전남 신안군 가거도 독실산에서 산거머리 해마딥사 류큐아나(Haemadipsa rjukjuana)를 발견했다고 한다. 산거머리는 아열대 지역에 사는 벌레인데 지구온난화로 서식범위가 넓어진 것 같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산거머리가 홋카이도를 제외한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된다면 기자는 이제 여름에 산은 다 갔다. 발표자료에 따르면 산거머리는 땅속에서 휴면하고 있다가 온도 25도, 습도 60%가 넘으면 활동을 시작한다고 한다. 장마철에 나타나 9월까지 활동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거머리가 16종이나 있지만 이건 모두 물에서 산다. 친환경 벼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머리를 볼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산거머리는 동물의 이동통로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동물의 움직임으로 인한 미세한 온도변화나 공기의 움직임, 진동을 감지하면 바퀴벌레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이동해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진다.

●동물 DNA, 거머리 피 안에 수개월간 잔존

과학저널 ‘네이처’ 4월 26일자에 거머리 관련 연구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읽어보니 산거머리 얘기다. 산거머리가 멸종위기 포유류의 서식지를 파악하는데 이용된다는 것. 스토리는 이렇다.

유전학자인 덴마크 코펜하겐대 토머스 길버트 교수는 의료용 거머리를 갖고 실험을 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염소의 피를 빨게 한 거머리에서 피를 채취해 DNA를 분석하자 수개월이 지나도 염소의 DNA가 발견됐던 것. 그는 이로부터 야생의 거머리를 채집해 혈액의 DNA를 분석하면 그 서식지에 사는 포유동물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야생생태학을 연구하고 있는 니콜라스 윌킨슨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에서 이메일을 보내 그곳의 산거머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윌킨슨은 수년째 베트남 안남(Annamite)산 일대에서 희귀 포유류인 사올라(saola) 영양을 연구하고 있다. 1992년 두개골이 처음 발견된 사올라는 현지인들이 가끔 목격했다는 보고가 있을 뿐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희귀종으로 ‘아시아의 유니콘(Asian unicorn)’으로 불린다. 2010년 현지인이 사올라 한 마리를 생포해 화제가 됐으나 며칠 뒤 죽어버렸다. 하지만 사체에서 DNA를 추출할 수 있었다.

무인카메라 설치 등 기존 방법으로 사올라를 찾아 서식지를 밝히려는 노력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윌킨슨은 길버트의 이메일을 받고 안남산 일대의 산거머리를 채집해 보내줬다. 거머리를 잡기는 너무 쉬웠는데 연구자들이 밀림을 돌아다니기만 하면 산거머리가 알아서 달라붙기 때문이다.

산거머리를 받은 길버트는 즉시 혈액을 뽑아 DNA를 분석했는데 아쉽게도 사올라의 DNA는 찾기 못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전 발견된 희귀종인 쭈옹손문착사슴, 안남줄무늬토끼의 DNA를 찾는 데는 성공했다고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보고했다. 길버트는 “어떤 지역에 사는 동물들의 스냅사진을 얻는 아주 쉬운 방법”이라며 산거머리를 이용한 DNA분석법이 널리 쓰일 것으로 전망했다. 그동안 포유류의 따뜻한 피를 빨아먹기만 했던 산거머리도 이제 약간의 희생제물을 바치게 된 셈이다.

설마 이 에세이를 읽고 영감을 얻어 남한에 호랑이나 표범 같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산거머리를 뿌리려는 과학자가 나타나지는 않겠지.

강석기 기자 suk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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