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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9996 | 2010-02-08

옛날에 이런 사건이?
조선 정조 8년(1784년) 황해도에서 한 젊은 여인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여인은 목에 상처가 있었고 목에는 줄이 매어져 있었다. 시신은 닭장 옆의 짚더미가 있는 작은 헛간에서 발견되었으며 시어머니가 발견하여 신고하였다. 해당 관청의 수령이 사건현장에 도착하여 “무원록”의 지침에 따라 시신의 상태, 상처 등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일차 부검 결과 목에는 상처가 있었지만 목을 맨 흔적이 있고 손에 상처(방어흔)가 없다는 이유로 자살로 판정이 나는데…….




과학수사의 역사
1900년대 이전에는 현대적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로 과학수사는 법의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법의학 분야는 중국에서 가장 빨리 시작되어, 1247년 중국 송나라의 법의학자인 송자가 “세원집록”을 집필하였다. 이는 최초로 법과학 저술서로 평가받고 있다. 1900년대 이후에서야 과학적 수사에 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과학수사를 전담할 수 있는 조직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국과학수사연구소 또는 범죄연구소 등이 연속적으로 창설되었다. 1900년대 초반에 영국에서 개인을 식별하기 위한 지문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었으며, 혈액형의 발견, 공구흔의 범죄수사 이용, 현미경이 발견됨에 따른 미세증거물의 범죄수사 이용, 거짓말탐지기 탄생 등 기초적인 과학적 분석 방법들이 범죄수사에 응용되기 시작했다. 1900년대의 중반기를 지나면서 분석기술이 고도화 되면서 물리, 화학적 분석 방법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 분석 기술의 개발은 획기적인 과학수사의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최근 20여 년 동안은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학수사에 도입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현재는 최첨단화 된 분석 방법이 도입되고 여러 분야의 기술이 결합되어 더욱 고도화된 분석 기술이 범죄수사에 이용되고 있다. 1900년대 이후 각 분야별 발전과정을 알아본다.





개인식별분야개인식별 즉, 범인을 확인하는 감정은 범죄수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를 위한 감정방법이 매우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왔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분야가 지문과 음성분석이다. 지문의 경우 1600년대 이미 손가락 융선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1900년대 초반에는 지문이 범죄의 증거로 채택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지문을 자동으로 검색할 수 있는 지문자동감식시스템이 도입되어 신속성이 증가하였다. 음성분석에 의한 개인의 식별은 194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그동안 분석 장비의 향상으로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 현재 음성인식 기술은 법과학 이외에도 많은 분야에 이용되고 있다.





* 지문과 DNA
지문과 DNA



* 음성식별
음성식별





생물/DNA분석1900년대 초에 란트슈타이너가 혈액형 분류체계를 분류하였으며 1915년에는 혈흔에서 ABO혈액형 검사법이 개발되었다. 이 방법은 매우 오랫동안 개인식별에 이용되어 왔다. 이후 효소형 검사 등이 개발되어 사용되어 오다가 1985년 알렉 제프리즈가 사람마다 다른 유전자 부위를 발견하고 이들을 실제 살인사건에 적용하여 개인을 식별하는데 유용한 방법임을 증명하면서 개인식별 분야는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 그 후 수많은 검증과 기술적 발전을 거듭한 끝에 1987년 미국에서 최초로 DNA분석 결과가 법정증거로 채택되었다. 그 후 많은 첨단 분석 장비가 개발되고 분석용 키트도 상용화되어 검출 한계가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분석 시간도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현재 모든 나라에서 표준화된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을 실시하고 있으며 많은 나라에서 유전자은행이 운영되고 있다.



 

 

 

 



* 알렉제프리즈 및 그가 발표한 논문




물리, 화학분석 분야1921년 “로카르드의 교환법칙”이 발표되면서 미세증거물에 대한 인식에 확산되었다. 1900년대 초반에는 공구흔, 타자흔 등의 흔적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으며 이들은 실제로 범죄를 해결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후 다양한 현미경의 개발 및 분석 장비가 개발되면서 매우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분자수준의 물질을 검출할 수 있는 장비들이 각종 미세증거물의 성분분석, 물질의 동일성 여부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어 과학수사 발전을 견인하고 있다.





범죄심리분야범죄수사에서 거짓말을 탐지하려는 노력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초기에는 단순히 거짓말을 하면 일어날 수 있는 호흡 또는 맥박의 변화를 측정하는 것에서 1921년 호흡, 맥박, 혈압 등을 연속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장비가 개발되었다. 그 후 이를 개량하여 지금 사용하고 있는 장비의 기본 틀을 완성하였으며 그 후 꾸준히 장비가 개량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는 뇌파검사 등이 새로이 거짓말을 탐지하는데 사용되고 있으며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표. 과학수사 주요 연혁 (* 붉은색 글씨는 한국의 경우)






과학수사 주요 연혁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역사


조선시대과거나 현재나 범죄는 늘 있어왔고 그 수법은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교묘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또한 계속되었다. 우리는 조선시대, 그 아주 옛날에 무슨 과학수사를 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체계화된 시스템으로 사인을 밝히고 사람의 실수를 최소한으로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중 하나가 복검, 삼검으로 필요한 경우 여러 번의 부검도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검안도 지침서에 의해 철저하게 기록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는 지금과 같은 과학적 분석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과학수사는 거의 검안과 부검에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검안과 부검 과정은 매우 중요하였다. 특히, 피해자가 사망한 사건의 경우는 매우 중하게 여겨 수령이 직접 부검에 참여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왕에게까지 보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주검에 관한 수사는 대부분 중국에서 “세원록” 등을 참고로 편찬한 “무원록”을 따랐다. 세종 때는 최치은 등이 이 책에 주석을 달아 새로 편찬한 “신주무원록” 발간되어 조선말까지 사용되었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사인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사인별 특징 및 사인을 판단하는 방법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검시, 부검절차, 보고서 작성 등 수사에 관한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근대 및 현대우리나라 과학수사는 1955년 3월 25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감정기관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창설되면서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현대적인 틀을 갖추게 된 것은 1990년대 이후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990년대 이후로 유전자분석, 미세증거물 및 법최면 등 새로운 분석 방법이 도입되고 첨단화된 분석 장비가 도입되면서 우리나라의 과학수사는 획기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많은 과학적 수사기법들이 현장에서도 쉽게 사용될 수 있어 각 경찰청 등에서도 미세증거물, 범죄프로파일링, 거짓말탐지검사 등 과학적 수사방법이 실제 사건에 적용되어 수많은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





* 유전자분석의 발전 과정
유전자분석 방법의 발전과정



*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사건 해결!
일차 부검 결과 의심점이 많아 이차 부검을 실시하였다. 이차부검 결과도 다시 자살로 결론났다. 이유는 손에 방어흔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살해당했다면 이를 방어하기 위한 상처가 손에 있어야 하는데 없었으며 목 부분의 상처 깊이가 다른 것으로 보아 목을 매서 자살을 하려다 뜻을 못 이루자 자신의 목을 여러 차례 찌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차 부검에서는 목 부분에서 목맴흔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참작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건은 결국 자살로 결론이 나서 끝나는 듯 하였다. 하지만 관찰사가 검안 기록을 모두 검토한 끝에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재수사를 지시하였다. 그리고 피해자의 오빠가 동생이 절대로 자살할 리가 없으며 분명히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며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곧바로 정조에게 보고되었고 정조는 사건을 철저히 밝혀 억울함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결국 이 사건에 대해 다시 철저한 재수사가 진행되었다. 재수사 결과 시어머니와 시종들이 사건을 자살로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검 결과에 대한 재검토 결과 손에 방어흔이 없는 것은 “무원록”의 “남에게 급소를 찔리면 저항을 할 수 없어 방어흔이 없다.”를 인용하여 설명하였으며, 목을 맨 자국이 처음에는 있었으나 나중에 없어진 것은 죽은 뒤에 목을 맨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시어머니는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았다.




한걸음 더!
조선시대의 형벌조선 시대에 죄를 지은 사람들은 어떤 형별은 받았을까? 조선시대의 형벌은 태형, 장형, 도형, 유형 및 사형의 5형을 기본으로 하였다. 형벌의 집행은 엄격하게 관리하였으며, 군, 현의 수령은 장형 이하, 관찰사는 유형 이하의 사건만 처리하게 하였으며 사형은 임금의 재가에 의해서만 집행할 수 있었다. 1. 태형 및 장형: 가벼운 형벌로 일종의 매를 치는 형벌이다. 집행은 죄수를 형대에 묶은 다음 둔부를 노출시켜 매의 대수를 세어가면서 집행한다. 부녀자는 옷을 입은 채로 하지만 간음한 여자는 옷을 벗겨 집행하였다. 태형과 장형은 비슷한 형벌이지만 장형이 태형보다 중한 벌로서 회초리의 크기가 크고 맞는 횟수도 많았다. 2. 도형: 오늘날의 징역형이 해당하는 것으로 일정 기간 관아에 구금하고 소금을 굽거나 쇠를 불리는 노역을 부과하였다. 도형은 1년에서 3년까지인데 반드시 장형이 부과되었다. 3. 유형: 중죄를 범한 사람에게 귀양을 보내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사형을 면한 대부분의 정치범들이 유형으로 처벌되었다. 4. 사형: 오늘날의 사형과 같은 극형으로 교형과 참형의 두 방법으로 집행하였다. 교형은 목을 매어 죽이는 것이고, 참형은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반인륜적 범죄, 반역죄 등 일반인에게 경계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오살, 육시, 거열 등의 잔인한 방법으로 집행하였다. 사형의 확정은 반드시 임금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다.

 

 


조선시대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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